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

2017. 3. 22. 00:05라이트노벨 줄거리/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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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원

 

 

 

 

 

 

 ▷ 작가 : 신카이 마코토

 ▷ 번역 : 김효은

 ▷ 장르 : 일상, 드라마

 ▷ 내용 : 집과 사회로부터 내던져지다시피 한 타카오와 유카리가 고독을 피해서 갔던 어느 정원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 아키즈키 타카오

 

 - 15세. 고등학교 1학년.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구두를 닦아오며 숙녀화에 매력을 느낀 그는 구두장이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항상 메이지 신궁 정원에 있는 정자에서 스케치 연습을 하고 있으며, 이 습관 때문에 유카리를 만나게 된다.

 

 

 ▷ 유키노 유카리

 

 - 27세. 국어교사.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며, 이 때문에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이런 부분을 매우 싫어한다. 미각에 이상이 생겨 휴직을 한 그녀는 비오는 날나마 정원에서 맥주를 마신다.

 

 

 ▷ 아키즈키 쇼우타

 

 - 26세. 타카오의 형. 휴대전화 회사 영업사원. 리카와 만나게 되면서 집을 나가 따로 살기 시작한다.

 

 

 ▷ 아키즈키 레이미

 

 - 47세. 타카오와 쇼우타의 엄마. 대학교 직원. 이혼한 이후, 자유 연애를 중시하며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테라모토 리카

 

 - 22세. 쇼우타의 여자친구.

 

 

 ▷ 마츠모토

 

 - 15세. 고등학교 1학년. 타카오의 고등학교 동기로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히로미와 사귀고 있다.

 

 

 ▷ 사토 히로미

 

 - 16세. 고등학교 2학년. 마츠모토의 여자친구로, 교우관계가 넓고 타카오와도 사이가 좋다.

 

 

 ▷ 이토 소이치로

 

 - 타카오의 학교 담임 선생님. 담당과목은 체육이며, 농구부의 고문. 과거 유카리와 사귀는 사이였다.

 

 

 ▷ 아이자와 쇼우코

 

 - 17세. 고등학교 3학년. 화사한 외모에 성적도 좋아 인기가 많다.

 

 

 ▷ 리샤오홍

 

 - 23세. 상하이에서 온 유학생. 여러 부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며, 중국집 아르바이트로 알게 된 타카오를 많이 도와준다.

 

 

 ▷ 요우코

 

 - 25세. 샤오홍의 여자친구.

 

 

 

 


 

(1) 비, 까진 뒤꿈치, 우렛소리[각주:1] - 아키즈키 타카오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키즈키 타카오에게 아침의 만원 열차는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기가 많은 우산, 양복의 나프탈렌 냄새, 타인의 체온, 얼굴에 직접 오는 에어컨 바람 등, 타카오는 이미 두 달째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짜증스러웠던 타카오는 마음 속으로 만화책의 광기어린 살인마처럼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면 속이 후련해질까도 생각했지만, 자신 같은 사람은 분명 살해당하는 엑스트라일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한 생각은 금새 접고 말았다. 결국 환승역에서 내린 타카오는 전철을 환승하지 않기로 생각했고, 그 때문인지 그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타카오는 걸어서 메이지 신궁의 잔디밭이 있는 정원으로 갔다. 그곳은 메타세쿼이아와 상수리나무로 이루어진 잡목림을 빠져나와야 도착할 수 있었고, 넓은 연못과 일본식 정원이 있는 곳이었다. 연못 위의 아치교를 걷던 타카오의 모카신 슈즈는 비 때문에 어느새 물을 잔뜩 머금은 상태였다. 타카오는 잔디밭에서 탑을 올려다보며 2년도 더 된 그 결심을 다시 떠올렸고, 그를 대신에 대답하듯 천둥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타카오가 중학교에 입학한지 3개월쯤 지난 시절, 그의 이름은 후지사와 타카오였다. 타카오에게 자신의 학창시절 연애담을 얘기해주던 그의 엄마는 갑작스레 이혼 결정 사실을 통보해왔다. 근거는 없었지만 아마도 고1 정도되면 어른이 맞을 것이라 생각한 타카오는 3년만 더 기다려달라는 푸념아닌 푸념을 늘어놓았고, 엄마와 함께 부둥켜 안고 울었다. 맥주 두 캔을 비우고 소주에 물을 타서 마시기까지 하며 엄마와 함께 술을 잔뜩 마신 타카오는 숙취 때문에 난생 처음 학교를 빼먹기까지도 했었다. 어찌됐든 타카오의 성은 친권자인 어머니의 것을 따라 후지사와에서 아키즈키로 바뀌었고, 다만 학교에서는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형식상 그대로 후지사와를 사용했었다.

 항상 공원 나들이로 정해져 있는 카스가 미호와의 데이트 때문에 타카오는 많은 공원[각주:2]을 다녀보았다. 타카오는 미호와 함께 걸으며 토리이[각주:3] 앞에서 사진을 찍고, 본전 앞에 걸린 에마[각주:4]를 읽어보고, 기요마사 우물을 견학했다. 최근 들어 타카오의 마음은 불안하고 주눅이 들었었는데, 미호와 함께 있으니 그러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타카오는 미호의 따스한 체온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둘은 어느새 신주쿠 역 미나미구치까지 도착한 했고, 헤어지기 전 미호는 내일부터는 학교를 꼭 나오라고 말했다. 울상인 얼굴로 자신을 뚤어져라 바라보는 미호의 얼굴을 본 타카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신경쓰지 말라는 말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미호는 부모님이 이혼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니 혼자 삐뚤어지지 말라며 그가 전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키스할 용기는 있으면서 어째서 남들에게 평범하게 대하는 것은 못하냐고 말하고는 먼저 개찰구를 빠져나가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타카오는 혼자서 두 시간 정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타카오는 어릴적부터 엄마의 신발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는 숙녀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타카오가 신발을 닦는 것을 딱 마쳤을 때에 때마침 들어온 그의 형은 동생의 모습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무뚝뚝한 반응을 했다. 그의 형은 아직도 그런 일을 하냐며 기분 나쁘다는 말을 했고, 타카오는 순간적으로 고함을 치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타카오는 거실로 가는 형의 뒷모습에서 멀어져가는 미호나 집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타카오에게 있어서 모든 이들은 타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타카오가 등교하자 친구들과 선생님의 반응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타카오는 오히려 그런 그들의 반응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타카오는 3학년 선배인 미호를 찾아 3학년 교실로 갔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고, 방과 후 교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미호의 친구들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미호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전학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타카오는 미호의 친구에게 부탁해 자신이 어른이 되기로 했다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를 격려하는 내용의 짧막한 답장은 몇 주 후에나 도착했다.

 천둥이 울리고 불현듯 타카오의 머리속에는 우렛소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비를 긋기[각주:5] 위해 항상 가던 정자로 향한 타카오는 정장을 입은 어떤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타카오는 비가 곧 그칠 것이라 근거없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2) 부드러운 발소리, 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 사람에게는 누구나 조금씩 이상한 면이 있다 - 유키노

 

 그칠줄 모르는 빗줄기 속에서 유키노 유카리 앞에는 비닐우산을 쓴 타카오가 나타났다. 유카리와 타카오는 2미터 정도되는 L자형 벤치의 양 끝에 앉았다. 타카오는 벤치에 앉아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고, 유카리는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타카오는 유카리 쪽으로 지우개를 떨어뜨렸고, 유카리가 그것을 주워주자 타카오는 당황해하며 받아들었다. 타카오는 유카리에게 어디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에 유카리는 쌀쌀맞게 대응했다. 타카오는 민망하다는 듯이 사과를 했고, 맥주 한모금을 다시 들이키던 유카리에게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유카리는 말을 바꿔 본 적이 있을 것이라 말했고, 타카오는 움찔하며 유카리를 다시 쳐다보았다. 유카리는 타카오에게 '우렛소리'라고 속삭이고는 시의 한 구절[각주:6]을 읇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유카리가 중학생인 시절, 유카리는 이질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 외모를 지녔었다. 때문에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미모가 매우 싫었다. 왜냐하면 남학생들에게는 관심어린 시선이, 여학생들에게는 시기어린 시선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떄문에 유카리는 평범함을 동경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평범한, 그녀가 도달해야하는 곳을 보여준 사람이 히나코 선생님이었다. 히나코 선생님은 20대 후반의 국어 교사였는데, 자신의 예민한 외모와는 달리 그녀가 지닌 동그랗고 다정한 얼굴에 푸근한 몸매와 온화한 성격과 소박하고 친근한 이미지는 그녀에게 있어 동경의 존재였다. 유카리는 중학시절 3년 내내 히나코 선생님이 담임이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문인 미술부에 들어감으로써 항상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유카리는 자신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있어 히나코 선생님이 그것을 희석시켜주고 있다고 믿었다.

 고등학생이 된 유카리의 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중학 시절과는 달리 인간다운 면모가 더 베어들었다. 같은 중학교를 나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유카리에게 더욱 인간다워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카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종종 히나코 선생님을 보러가기도 했다. 유카리는 히나코 선생님을 항상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는데, 그 행동이 히나코 선생님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지워줬을 것이란 점은 유카리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대방에게만 무거운 마음을 지워주는 것, 즉 혼자만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것은 매우 괴롭다는 것이었다.

 유카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거의 혼자였고, 이 점은 히나코 선생님을 그녀가 매달리다시피 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유카리는 꺄르르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걸어가는 여고생 두 명을 보면서, 그녀들이 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에 움찔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의 기력을 점점 빼앗아갔고, 결국 그녀는 근처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토사물이 나오지도 않는 토악질을 해댔다. 국정공원의 센다가야문을 통과해 계속해서 걷던 유카리는 일본정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고, 편안해진 마음과는 달리 무서운 몸을 이끌고 우산을 접으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캔 맥주를 따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히나코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근을 간다고 알렸지만, 유카리와 함께 걸으면서 자신이 전근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사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히나코 선생님은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유카리는 히나코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히나코 선생님을 버리는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히나코 선생님은 어차피 사람에게는 누구나 조금씩 이상한 면이 있다고 말해주었지만, 유카리는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이해같은 것은 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정원의 벤치에서 선잠을 자던 유카리는 익숙한 발소리에 눈을 떴다. 당연히 비닐우산을 쓰고 오던 소년인 타카오였다. 유카리는 어쩐지 타카오와 마음이 잘 통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유카리가 그에게 학교를 땡땡이쳤냐고 묻자, 타카오는 유카리에게 회사를 땡땡이쳤냐고 반문했다. 타카오는 유카리에게 몸에 좋지 않다며 술을 그만 마시라고 했고, 이에 유카리는 안주가 있다며 초콜릿을 꺼내면서 같이 마시자고 했다. 유카리는 당황한 타카오에게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냐며 묻고는 히나코 선생님이 했었던 말, 즉 사람은 누구나 이상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유카리는 10년 전 무너질 것 같이 보였던 히나코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모르는 사이에 누구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유카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타카오는 비오는 날에는 오전 수업만 빼먹기로 했다며 자리를 뜨려 했고, 유카리는 또 만날 수 있겠다고 자신도 생각치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타카오는 '만약 비가 온다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떠나갔다.

 

 

(3) 주연 여배우, 독립과 머나먼 달, 10대의 목표는 작심삼일 - 아키즈키 쇼우타

 

 아키즈키 쇼우타는 테라모토 리카와 사귀고 있었다. 쇼우타는 리카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모든 비용을 자신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특징이 없다고 생각하는 쇼우타에게 있어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 과시였다. 리카가 자신의 꿈 때문에 타인에게 얹혀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혼잣말로 의문을 표시하자,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결코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라 생각한 쇼우타는 뭔가 자신을 좀 더 내세울 수 있는 요소를 찾으며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쇼우타가 리카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았다. 쇼우타가 직장동료 타나베의 부탁으로 연극 티켓을 대신 구매해주었고, 덤으로 자신도 연극을 보러 가게 되었다. 연극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쇼우타는 부조리한 현실을 토로하는 연극에 지루한 감정 밖에 없었다. 쇼우타는 주연 여배우의 외모나 감상하면서 본전을 뽑을 생각을 했지만, 연극이 시작된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연극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연극이 끝난 후, 쇼우타는 연극을 본 감상을 진솔하게 말했고, 그것을 들은 타나베는 그 여배우와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쇼우타, 타나베, 타나베의 여자친구, 주연 여배우이자 배우 지망생인 여대생, 이 네 사람은 시부야에 있는 이자카야의 개별실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주연 여배우, 즉 리카는 오사카 출신으로 대학교 2학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평범하게 대학을 나와 영업사원이 된 자신과는 달리, 리카는 객원배우나 엑스트라, 잡지나 광고 모델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수많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작은 지역의 잡지에 들어갈 사진이거나, 그저 스쳐지나가고 마는 인지도가 적은 것일지라도, 쇼우타에게 있어서는 연예계와 같은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쇼우타는 리카의 말을 들으며 모종의 질투심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이것은 다양한 감정들이 얽혀 매우 복잡하게 느껴지는 고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쇼우타는 혼자 식탁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어서오라고 말은 해주었지만, 말투 자체는 퉁명스러웠다. 3년 전 이혼을 한 엄마는 자유연애를 만끽하고 있었으며, 벌써 4번째 남자인 키요미즈라는 사람을 사귀고 있었다. 키요미즈는 사업이 잘 안된다는 것을 이유로 각종 비용을 엄마에게 부담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면 쇼우타는 리카에게 허세를 부리려는 의미에서 자신이 비용을 다 대고 있었다. 그리고 쇼우타는 독립을 해 나가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쇼우타는 영업실적이 낮아져 상사에게 엄청 깨진 뒤,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남자친구의 문제로 또 가출한 모양이었고, 동생 타카오가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타카오는 쇼우타에게 엄마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꺼냈지만, 쇼우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여름이 끝나기 전에 나가서 살겠다고 말한 것을, 타카오에게는 한 달 뒤에 나가서 살겠다고 말했다.

 쇼우타는 동생이 수제 신발 제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했다. 항상 자유연애를 만끽하는 엄마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쇼우타는 두 사람처럼 몰두하거나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엄마는 3주가 지나도 집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고, 쇼우타의 바닥을 치는 영업실적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리카의 생일에 쇼유타는 리카와 만났다. 리카는 핼쑥해진 쇼우타를 걱정했고, 여러가지 화제로 조잘조잘거렸다. 하지만 쇼우타의 반응이 시원치않자, 리카도 어느새 말수가 줄어버렸다. 쇼우타는 아무리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서 리카의 생일에 이런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싶었던 쇼우타는 리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리카와 얘기를 나누던 타카오는 형이 그녀의 연극에 몇 번을 갔냐고 물었는데, 리카는 처음 만났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사실 쇼우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인 리카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특별한 존재임을 재확인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지금껏 그런 곳에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었다.

 타카오는 리카에게 쇼우타가 원래 축구를 했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취직을 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술에 취했던 쇼우타는 어렴풋이 둘의 얘기를 듣고는 생각했다. 사실 자신은 입시적인 측면이나 기호적인 측면에서나 축구를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학 팀 동료들의 축구 실력을 직접 체험한 쇼우타는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음을 느끼고는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었다. 그리고 쇼우타는 축구 프로의 꿈을 접고 취직의 길로 나아간 것이었다.

 쇼우타는 8월 초쯤에 이사를 했고, 타카오와 대화를 나눴던 리카는 그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카가 타카오의 신발 얘기를 꺼내자, 쇼우타는 동생이 직접 그것을 만든 것이라 말했고, 이에 리카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쇼우타는 작심삼일이 될지도 모른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쇼우타는 지금까지 꿈이든 목표든 삶의 요구 앞에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바꾸고 버려와야 했고, 그것을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쇼우타에게 있어 타카오는 분명 특별해 보였고, 리카 역시도 여전히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4) 장마 초입, 먼 산봉우리, 달콤한 음성, 세상의 비밀 그 자체 - 아키즈키 타카오

 

 타카오는 또 만날 수 있겠다는 유카리의 말에 어쩐지 모를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며, 어차피 그녀도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유카리의 말을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정원으로 간 타카오는 유카리로부터 커피 한 잔을 건네받았다. 유카리가 살갑게 대함에도 불구하고, 타카오는 그녀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타카오는 정자에 아무도 없기를 원했지만, 항상 유카리가 먼저 와 타카오를 반겼다. 유카리는 술을 마시며, 타카오는 주변의 여러가지 사물을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냈다. 타카오가 보기에 유카리는 분명 미인이었지만, 오히려 이 세상의 존재라고 믿겨지지 않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타카오는 속으로 유카리를 설녀, 아니 '우녀'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방과 후, 타카오는 중학교 동창인 마츠모토의 여자친구이자 한 학년 선배인 사토 히로미에게 강제로 이끌려갔다.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값싼 아이스크림으로 두 시간을 넘게 죽치며 셋이서 시간을 보냈고, 타카오도 친구와 잡담을 나누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마츠모토와 히로미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면서, 타카오는 어째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을 끌어들이려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츠모토는 항상 연상녀가 좋다며 떠들어댔는데, 잘 생각해보면 타카오의 주변에는 연상녀가 꽤나 많았다. 타카오는 중학교 3학년 4월말 경부터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는데, 일하면서 알게된 리샤오홍의 여자친구 요우코, 형의 여자친구 리카, 우녀 유카리 등이었다. 타카오는 유카리의 나이만을 몰랐고, 그녀의 나이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좀처럼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6월 말로 접어들어 타카오는 구두 전문학교를 알아보았다. 총 수강비는 220만엔 정도였는데, 타카오가 3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당할 수 있는 금액도 대략 200만엔 정도였기 때문에 무리수는 아니었다. 유카리는 타카오가 구두장이가 되려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저 아무 말없이 웃어만 주었고, 타카오는 그녀가 '대단하다'라든지 또는 '힘 내'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아 부끄러울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타카오는 항상 비가 오기만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타카오는 샤오홍과 요우코의 초대로 셋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요리를 만들던 샤오홍은 먼저 가라며 옥상 열쇠를 건넸고, 타카오는 잠시동안 옥상에서 요우코와 단 둘이 있게 되었다. 요우코는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각주:7], 금새 평소와 같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요우코는 타카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고, 타카오는 비오는 날마다 학교를 빼먹고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넉넉하게 도시락을 싸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더불어 음식을 먹는게 서툴고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요우코는 어쩐지 근사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타카오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 날 저녁 이후, 타카오는 샤오홍과 요우코를 자신의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하지만 이 날은 샤오홍과 요우코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되었고, 이 날로부터 며칠 뒤에야 샤오홍이 홍콩으로 귀국했다는 것[각주:8]을 알게 되었다. 반면 샤오홍이 없었기 때문에 요우코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정원에 도착한 타카오는 유카리에게 회사에서 짤리지 않냐고 물었지만, 유카리는 대답하지 않고 타카오의 그림에만 관심을 가졌다. 타카오는 항상 싸오던 도시락을 꺼냈는데, 유카리는 미안하다며 자신도 도시락을 꺼냈다. 타카오는 유카리가 만든 계란말이를 먹었지만, 안에는 계란껍질이 있었고, 유카리는 요리에 자신이 없다며 자신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타카오는 유카리와 티격태격대면서 도시락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고, 드디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찾아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카리를 위해 구두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5) 자줏빛 찬란한, 빛의 정원 - 유키노

 

 유카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침대에 뻗었다. 집은 어질러진 상태였지만, 유카리는 어느 것 하나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유카리는 타카오와 정원에서 만나는 시간을 통해 그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고, 마음은 들떠있는 상태였다. 다만, 자신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얘기하지 않은 유카리는 이런 자신이 괜찮은 것인지, 정원의 정자에서 자고 있는 타카오에게 속삭이듯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작년 겨울, 유카리는 쏟아지는 업무를 마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볼로네제를 먹었다. 유키리는 볼로네제에서 나는 냄새는 맡을 수 있었지만,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유카리는 이 사실을 내심 부정하며 편의점에 갔고, 온갖 음식을 사서 데워 먹어보기 시작했다. 분명 피어나는 김과 냄새는 인식할 수 있었지만, 유카리는 여전히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후, 병원에 간 유카리는 온갖 검사를 한 끝에 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과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런 당연한 처방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화를 내려다 참고 말았다. 유카리의 식욕은 점점 떨어져갔고, 오직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인 초콜릿, 빵, 과자, 케이크, 맥주, 와인 등으로 연명해 간 그녀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갔다. 그럼에도 유카리는 몸단장만큼은 철저하게 했는데, 그녀는 이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보이지 않는 지옥을 안고 살아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공무원이었던 유카리는 쉬기 위해서 사직을 하려 했지만, 상사의 배려로 휴직을 하게 되었다. 유카리는 지금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 이토 소이치로에게 타카오의 음식을 먹자 맛이 느껴졌다고 전화를 했다. 다만, 소이치로에게는 소년 타카오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만난 아주머니라고 해뒀었다. 괜찮다,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소이치로의 말에 유카리는 속에서 품고 있던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유카리가 와 헤어지게 된 것이 소이치로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임을 잘 아는 유카리였지만, 어느 틈엔가 소이치로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유카리는 어떤 감정을 한 번 잃으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비오는 날이 되자 유카리는 반가운 비에 들뜨기 시작했다. 유카리는 몸단장을 하고는 곧바로 정원으로 갔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타카오가 있었다. 유카리는 그동안의 도시락에 대한 답례라며 타카오에게 구두 만들기 해설서를 선물했고, 비싸서 좀처럼 사지 못했던 것을 얻은 타카오는 상당히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타카오는 지금 여자 구두 한 켤레를 만들고 있는데, 누구에게 줄 것인지는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유카리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타카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타카오는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며 유카리에게 발을 보여달라고 부탁했고,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타카오의 모습을 본 유카리는 분명 자신의 얼굴도 그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타카오는 유카리의 발을 재기 시작했고, 유카리는 그에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타카오는 그것이 일에 대한 얘기냐고 반문했고, 유카리가 '이것저것'이라고 말하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유카리에게 있어 타카오와 함께 있는 시간은 완벽한 것이었고, 이 완벽한 시간은 유카리의 인생에서는 절정을 이루는 나날에 해당했다.

 장마가 끝나고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돌입하는 시기가 도래했고, 타카오는 정원에 없었다. 유카리는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어울리는 듯한 서운함을 느끼며 코끝이 시려왔다. 유카리는 장마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고, 그것을 입 밖으로 속삭여보았다. 유카리는 타카오가 오질 않는 정원에서 오전을 보냈고, 오후에는 신주쿠, 요요기, 하라주쿠, 가이엔 등의 주변을 정처 없이 걷는 것을 반복했다. 이는 8월 내내 이어졌다.

 유카리는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사이토라는 이름의 남성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이토는 유카리에게 관심을 보이며 같이 술을 마셨고,유카리가 말하는 시[각주:9]에 대한 것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찌돼도 상관이 없었던 유카리는 사이토에게 유도되었다. 술기운에 비몽사몽했던 유카리는 어느새 사이토와 함께 호텔가에 와 있었고, 정신을 차린 유카리는 사이토에게 미안하다며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알람 소리에 일어난 유카리는 오늘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정자에 도착한 유카리는 분명 슬프지는 않았지만, 눈가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유카리는 내일의 날씨가 어떨지 나지막하게 속삭였고, 혼자서 정원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자줏빛 찬란한 빛의 정원'이라는 말이 떠오른 유카리는 27살의 자신이 12년 전 15살의 자신보다 전혀 나아진게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6) 베란다에서 피우는 담배, 버스에 타는 그녀의 뒷모습,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 이토 소이치로

 

 소이치로는 최근 들어 지각이 부쩍 늘은 타카오를 불러 꾸찌람을 했다. 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소이치로의 고함소리를 듣고는 타카오가 지각하는 이유를 묻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소이치로에게 있어 1학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었고, 타카오에게 어떤 이유가 있든 알 바가 아니었다.

 소이치로는 매우 불쾌한 꿈을 꿨다. 꿈에는 소이치로, 유카리의 모친, 그리고 타카오가 나왔다. 모친은 소이치로에게 유카리와 사귀는 사이면서 그녀가 병이 걸리자 버린 것이냐며 따졌고, 타카오는 선생님이 줄곧 자신들을 속여왔다고 빈정댔다. 소이치로는 변명을 하며 사과를 했지만, 둘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소이치로에게는 불쾌함보다 더한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타카오는 소이치로가 담임을 맡게 된 반의 학생 중 한 명으로,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실 지각한 일도 예방차원에서 추궁한 것일뿐이지, 딱히 크게 꾸지람할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소이치로는 어째서 유카리에 대한 꿈에서 타카오가 나타났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다만, 유카리와 타카오는 타인에게는 결코 드러내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람들이라는 공톰점은 있다고 생각했다.

 소이치로가 체육교사가 된지 8년째 되던 4개월 전의 어느 날, 체육교사가 되기 전 부동산 회사에서 잠시 근무했던 소이치로가 일하면서 알게된 동료 나츠미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이치로는 그녀와 약 2년 간 사귀었었다. 술 한 잔을 권유하는 나츠미의 제안에 소이치로는 기분도 전환할 겸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츠미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저 자신이 즐겁기 때문에 웃는다며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오랜만에 만난 나츠미는 그런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었지만, 5년 전 쿠바에서 돌아와 현재 휴대용 게임회사에 다니는 그녀에게서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나츠미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소이치로가 잠시 밖에 나가 술과 안주를 더 사오는 동안, 그의 휴대폰에는 유카리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 내역이 찍혀있었다. 나츠미는 여자친구냐고 물었고, 소이치로는 그 말을 부정하며 전 남자친구라기보다 동료로서 전화를 걸었다. 출근 일수가 부족했던 유카리는 휴가가 끝나면 퇴직 수속을 밟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고, 소이치로는 학교 측에 전해주겠다고 답했다.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던 나츠미는 갑자기 그만 또 보자는 한 마디만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순간 영문을 몰랐던 소이치로는 금새 그만 가라는 말이라 이해하고는 나츠미의 집을 나왔다.

 소이치로에게 생전 처음으로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한 사람은 유카리였다. 유카리가 처음 전근을 온 날, 소이치로는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꼈다. 소이치로는 유카리의 아름다우면서도 가녀린 외모를 보고는 학생들이게 많이 휘둘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소이치로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유카리는 언제나 성실함을 보였고, 학생들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많은 호감을 얻었다. 교직원 회식 자리에서 유카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 소이치로는 술기운 덕분인지 처음으로 솔직하게 그녀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카리에게 사로잡힌 소이치로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소이치로는 학교에서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유카리를 불러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유카리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 소이치로는 단순히 학생들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도 질투를 했다. 특히 유카리의 주변을 멤도는 1학년생 아이자와 쇼우코라는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이 유카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소이치로는 누군가에게 유카리를 빼앗기기 전에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이치로는 크리스마스 저녁에 유카리를 불러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역으로 향하던 길에 유카리를 끌어안고는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이 순간의 소이치로는 믿기 어려울만큼 행복했고, 앞으로 이 순간이 잊혀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나츠미와 술을 마신 날로부터 두 달 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 소이치로는 나츠미와 몇 번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소이치로는 유카리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유카리는 교장과 만나 퇴직서를 제출했다. 유카리가 퇴직하는 이유는 마음의 병이었고, 이는 그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 9월, 2학기에 들어서 유카리를 잘 따르던 쇼우코의 태도가 급변해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쇼우코는 유카리의 수업만 지각을 하고, 유카리의 말만을 무시했다. 분명한 적의를 느낀 유카리는 소이치로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쇼우코는 카리스마를 발휘해 학생들이 유카리를 적대시 하는 구도를 만들었고, 연말이 되자 유카리의 상황은 가시방석이 되었다. 학교에는 유카리가 쇼우코의 남자친구에게 손을 댔다는 소문이 돌았고, 소이치로가 조사한 결과 그 남학생은 3학년 농구부 주장인 마키노였으며, 일방적으로 유카리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교내의 유카리에 대한 악의는 모두 퍼져있는 상태였고, 유카리는 출근하기 힘든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카리는 마음의 병을 얻고 말았다.

 그렇게 유카리가 결근을 시작할 쯤, 소이치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소이치로에게 살면서 자기 자신보다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꼭 찾아내라고 말했고, 그것만 이룬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소이치로가 유카리와 헤어질 때, 소이치로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고, 그는 자신보다 유카리를 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마지막을 끝내는 말도 유카리가 하게 만든 소이치로는 버스를 타는 유카리의 뒷모습을 보며 일찍이 만난 기적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유카리가 완전히 떠난 2학기의 어느 날, 소이치로는 타카오가 3학년과 주먹다짐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히 달려가 본 결과, 타카오는 3학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맞아 시커멓게 멍이 든 상태였고, 상처하나 없는 3학년 무리 중에는 쇼우코도 있었다. 소이치로는 상황을 자세히 파헤치지 못한 채 잔뜩 성이나 저항하는 타카오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소이치로는 자신이 타카오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겨울방학에 돌입한 12월 말의 어느 날, 정처없이 시부야를 거닐던 소이치로는 카페 창가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쇼우코를 발견했다. 소이치로는 담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우라며 말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은 없다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쇼우코를 본 소이치로는 그녀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소이치로는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핸드볼부를 담당하다가 한 학생이 뇌진탕으로 한 쪽 눈의 시력이 나빠지는 사고를 겪었었다. 때문에 지금은 학생들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여 그들의 안전을 최우선시 하고 있었다. 소이치로는 흡연은 나쁘다며 쇼우코에게 금연을 권했지만, 쇼우코는 소이치로로부터 피어나오는 담배 연기를 휘저으며 그가 할 말은 아니라며 역성을 냈다. 소이치로가 커피 한 잔을 사주겠다고 하자, 미심쩍어하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쇼우코는 소이치로의 뒤를 따랐다. 소이치로는 영원히 사라진 유카리를 대신해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아마 쇼우코에 대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7) 동경하던 단 하나의 것, 비 오는 날 아침에 눈썹을 그리는 것, 그 순간 벌이라고 생각한 것 - 아이자와 쇼우코

 

 커피 한 잔을 사준 소이치로는 쇼우코에게 겨울방학이 끝나면 상담실로 오라고 지시했다. 쇼우코는 고등학교 3학년 12월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진로 희망서를 백지로 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우코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쇼우코는 어릴 때부터 남자가 싫었다. 아빠는 몰래 애인을 만들고 있었으며, 세 살 위인 오빠도 항상 여자친구가 들끓었다. 그런 남자들과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남자가 싫어진 것이었다. 반면 여자다운 면이 부족했던 쇼우코는 인기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 시절, 쇼우코에게는 같은 초등학교 동기인 사야, 테시가와라와 어울려 다녔다. 사야, 테시가와라도 쇼우코와 마찬가지로 인기가 밑바닥인 동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중3이 된 쇼우코는 현실의 동조압력에 대한 피곤함을 뿌리치고 리얼충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는 평생을 기다려도 리얼충 쪽에서 자신을 이끌어주리는 기대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면 사야와 테시가와라는 절대 변하지 않기로 한 약속했지 않느냐며 혼란스러워했다. 쇼우코는 점점 자신을 가꾸는 방법을 터득해나갔고, 여름방학이 끝난 9월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쇼우코의 모습에 다른 학생들의 반응도 이전과는 달라졌고, 남녀를 불문하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쇼우코를 응시했다. 밖에서는 특히나 남자들의 시선이 불쾌할 정도로 쇼우코의 몸을 더듬었고, 쇼우코는 그저 외모를 바꾼 것만으로도 달라진 반응을 보이는 세상에 충격, 당혹감, 실망, 기묘한 쾌감 등의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쇼우코는 사야와 테시가와라와 어울리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세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끝날 무렵, 고교 생활에 돌입한 쇼우코의 삶은 즐거움으로 가득해져갔다. 그러던 쇼우코는 한 아름다운 여성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유키노 유카리로 학교 고전을 담당하는 국어 교사였다. 유카리는 모태 미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며, 외모 같은 것은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나 공평하게 대우를 해주었다. 쇼우코는 유카리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갈망했고, 그것을 위해 고전 공부만큼은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쇼우코는 다른 반인 사야와 마주치면 그녀에게 인사정도만 했고, 남고로 진학한 테시가와라와도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다른 학교를 다녔던 테시가와라와 함께 셋이서 모여보기로도 마음먹었지만, 2학년이 된 쇼우코는 3학년의 마키노 선배를 좋아하게 되면서 결국 셋이서 만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마키노와 사귀게 된 쇼우코는 오직 어떻게 해야 그가 기뻐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마키노는 쇼우코에게 처녀인지를 물었고, 다른 남자를 알아버린 여자는 털끝만큼도 흥미가 없다며 순결을 자신의 생일날 받아가겠다고 말했다. 마키노가 키스할까봐 눈을 꼭 감고 잔쯕 움츠려들었던 쇼우코는 눈을 너무 감았다며 그에게 놀림을 받았고, 창피했던 쇼우코는 키스 연습도 미리 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더운 여름 날, 마키노의 생일이 되기 전까지, 마키노에게 자신의 땀냄새가 나는 것이 부끄러웠던 쇼우코는 극도로 수분 섭취를 줄인 탓에 탈수증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무사히 첫경험을 치르고,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주는 마키노의 태도에 쇼우코는 안도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직전의 어느 방과 후, 쇼우코는 마키노가 유카리 선생님에게 고백하는 것을 엿보고 말았다. 유카리는 역정을 내며 마키노를 거부했지만, 마키노는 끈질기게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충격을 받은 쇼우코는 마키노와 사귄 이래 처음으로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귀가했다. 쇼우코는 마키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마키노가 전화나 메시지를 해주길 간절히 기다리며 참고 있었다. 하지만 쇼우코는 마키노가 두 번 연속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연락해야 하는 것을, 이것이 마키노와 사귀는 불문의 규칙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마키노를 찾아간 쇼우코는 유카리 선생님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마키노는 별 일이 아니라는 말투로 아니라고 쇼우코에게 대답하고는, 곧장 다른 친구들과 합류해 그저 시간을 투자해 압박하면 꺽일 것이라며 대화하고 있었다. 쇼우코는 그들의 대화가 지닌 진정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마키노는 오직 쇼우코의 몸만을 원했다. 쇼우코는 점점 마키노에게 매달렸지만, 점점 메말라가기만 했다. 결국 마키노는 쇼우코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쇼우코는 이런 상황이 된 이유, 즉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타겟을 유카리로 바꾸었다. 유카리를 철저히 몰락시켰던 쇼우코는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마키노로부터 철저하게 얕보였으며, 유카리는 선량한 피해자이며, 자신은 마키노와 더불어 그저 응석받이 어린애였다는 것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회상할 수 있었다. 쇼우코는 좋아했었다고 말하며 유카리를 계속해서 때리는 꿈을 종종 꾼다.

 유카리를 학교에서 쫓아낸 이후 3학년의 6월, 쇼우코는 우연히 테시가와라를 만났다. 테시가와라는 여전히 외모를 가꾸지않은 채 촌스럽고 음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테시가와라는 반가워하며 쇼우코에게 말을 걸었지만, 쇼우코는 이번엔 자신이 마키노가 되어 그가 했던 짓을 똑같이 테시가와라에게 할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쇼우코는 테시가와라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먼저 개찰구를 나가버렸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쇼우코는 평소에 타던 긴자선이 아닌 야마노테선을 탔다. 사야와 함께 등교하기 위해서였다. 쇼우코는 떠들썩한 교실에 앉아 있었고, 갑자기 1학년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는 쇼우코에게 다가오더니 쇼우코 본임을 확인하고는 유카리 선생님이 그만둔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짜증이 났던 쇼우코는 무슨 상관이냐며 소리쳤고, 남학생은 자신의 뺨을 후려갈겼다. 쇼우코는 이미 늦어버렸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년의 뺨 세례를 벌이라고 생각했다.

 

 

(8) 내리지 않아도, 물 밑의 방 - 아키즈키 타카오

 

 쇼우코를 때린 타카오는 주변의 남학생들에게 끌려갔다. 쇼우코는 타카오를 알 리가 없었고, 타카오가 유카리를 거론하자 3학년들은 타카오를 때리며 유카리를 빈정대기 시작했다. 타카오의 분노를 하늘을 찔렀지만 그들에게서 저항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타카오는 어째서 유카리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엄마는 3개월이 넘게 가출 중이었고, 형은 이사를 갔기 때문에 집에는 타카오 혼자만 이었다. 그런 타카오는 고독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카리를 만날 수 없는 것보다, 그녀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괴로운 심정이 들었다. 언젠가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을 한 유카리를 떠올린 타카오는 그녀가 마음껏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타카오에게 있어 유카리에게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타카오는 구두 만들기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짧게만 느껴지던 방학이 끝나고 9월, 타카오는 학교에서 유카리의 모습을 보았다. 타카오는 유카리를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나중에 얘기하자며 나가버렸다. 타카오는 마츠모토와 히로미에게서 유카리 선생님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고, 분노에 찬 타카오는 곧장 쇼우코에로 간 것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타카오는 어찌됏든 간에 쇼우코가 자신보다 유카리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대략 3개월 정도 알게 된 타카오의 것과는 다른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타카오는 지금까지 유카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에 대한 일만 생각했던 것에 대해 한심하게 여겨졌다.

 타카오는 비도 오지 않는 날에 정원을 찾았다. 무엇을 하러 온 것인지 자신조차 납득하지 못하던 타카오는 정원을 거닐면서 유카리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카리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타카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타카오는 '우렛소리'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자신이 처음 읊어준 시에 대한 답가라며 한 구절[각주:10]을 읇어주는 유카리가 나타나 타카오와 마주했다. 타카오는 교과서에 있는 만요슈를 어제 봤다고 말했고, 긴장은 점점 풀려가는 상태였다. 유카리는 타카오가 자신이 다니던 학생인줄 알고 있었기에 시를 들려주면 그가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지만, 타카오는 끝까지 자신을 몰라봤다고 했다. 유카리는 오직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타카오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어느새 주변은 소낙비로 희뿌옇게 변해 있었고, 타카오는 본능적으로 유카리의 손을 잡고 뛰었다. 유카리는 즐거운 기색이었고, 타카오도 웃었다. 그리고 타카오에게 남아있던 고독과 슬픈 감정은 이미 송두리째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후 유카리를 따라 그녀가 사는 맨션에 도착한 타카오는 샤워를 하고 밥먹을 먹으며 대화를 나우었다. 유카리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는 타카오에게는 더 이상의 불안과 초조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유카리의 따스한 미소를 느낄 수 있는 타카오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9) 말로는 못하고 - 유키노 유카리와 아키즈키 타카오

 

 타카오는 유카리에게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카리는 다음 주가 되면 사코쿠에 있는 본가로 이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미 혼자서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타카오가 준 구두가 없어도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말했다. 유카리가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자, 더 이상 자신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유카리를 뒤로하면서 타카오는 고마웠다며 황급히 나가려고 했다. 유카리는 그런 타카오를 잡으려다 말았고, 마음 한 켠에는 치워지지 않는 응어리가 그녀의 마음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유카리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방학을 마음껏 즐기며 여름방학 내내 정자에 오지 않은 타카오의 탓이라며 그를 탓하고 있었다. 그렇게 타카오를 원망하던 유카리는 자신들의 관계를 좀 더 아프지 않게 끝내지 못해서, 아직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카리는 현관문으로 뛰쳐나가 타카오를 쫓아갔다. 물웅덩이도 무시하고 첨벙첨벙, 내리는 비의 차가움도 잊고, 바닥에 부딫히는 고통도 무시한 채 달려갔다. 층계참에 서 있는 타카오를 본 유카리의 머릿속에는 오직 '우렛소리'라는 단어만이 떠올랐다.

 유카리가 자신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타카오는 아까 한 말은 잊어달라며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다고 말을 정정했다. 처음부터 상종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타카오는 자신의 얘기만 캐묻던 그녀가 비겁하다고 했다. 타카오는 유카리가 처음부터 선생님인 것을 알았다면, 구두장이가 되려는 자신의 꿈을 허무맹랑한 것이라 무시할게 뻔하기 때문에 말조차 섞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며 자괴감을 가졌다. 타카오는 어째서 처음부터 자신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울부짖었다. 이런 순간에도 타카오의 유카리를 향한 마음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타카오는 마음과는 정반대로 그녀를 비난했다. 그 순간, 유카리는 타카오에게 와락 안기며 울었고, 그녀의 달콤한 향기와 갑작스런 통곡에 타카오는 울음을 멈추었다. 유카리는 매일 아침 무서워서 학교를 갈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쥐어짜내듯이 말하는 타카오 덕에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떨리는 음성을 들은 타카오는 결국 유카리를 따라 다시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10) 어른은 따라잡지 못할 속도, 아들의 연인, 색이 바래지 않는 세상 - 아키즈키 레이미

 

 3월에 들어서 겨울의 추위가 조금은 누그러들쯤, 아키즈키 레이미는 아들 타카오가 만든 구두를 보며, 아들이 봄 구두를 선물해주고 싶어할 만한 여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두 달 전쯤, 타카오는 5센티미터 정도의 굽이 있는 펌프스를 보여주며 레이미에게 솔직한 평가를 부탁했다. 레이미는 고등학생이 만든 것 치고는 잘 만들었지만, 팔만한 물건은 아니라고 말했다. 부족함을 깨달은 타카오는 조그맣게 웃었고, 레이미는 그런 타카오를 격려해주었다. 레이미는 타카오가 구두를 주려는 상대가 연상임을 금방 알아챘고, 타카오는 그저 두세 살 위라고 거짓말을 했다. 레이미는 그 역시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그다지 추궁하지는 않았고, 혼자 술을 마시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타카오는 그 이후로 레이미에게 그 구두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5시 반, 대학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는 레이미에게는 동료 코바야시의 쨍쨍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코바야시는 등록금을 늦게 내 제적을 당할 한 여학생 나카지마 모모카와 상대하고 있었다. 등록금의 납부 기간은 한 달 전에 끝이 났었으며, 모모카는 두 번의 독촉 끝에 계좌에 입금하라는 통지에도 불구하고 현금을 들고 온 것이었다. 이미 은행도 문을 닫은 시간이기에, 코바야시는 모모카를 무시하고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미는 자신이 나서 코바야시를 대신해 업무를 처리해주었고, 2만엔이 부족한 것도 레이미가 채워주었다. 코바야시는 제적당해도 싸다며 화를 냈지만, 레이미는 교직원으로서 학생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레이미는 자신에게는 무르면서도 타인에게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대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이후 키요미즈와 저녁을 먹으며 코바야시와의 일을 얘기하던 레이미는 누구에게도 타인을 혼낼 권리 따위는 없다며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레이미는 타카오가 구두장이가 되려 한다는 얘끼를 꺼냈다. 처음의 키요미즈는 그저 입시에 자신이 없어 편법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몇 켤레의 구두를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 냈다는 레이미의 말에, 진정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만들고 있다는 말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레이미는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쇼우타를 보았다. 쇼우타는 여름 옷을 챙기러 왔는데, 그는 엄마과 딱히 긴 대화를 하지 않았다. 레이미는 쇼우타가 자신의 애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라도 얘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타카오는 혼자서 저녁을 먹고는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레이미는 쇼우타에게 타카오가 구두장이가 되려한다는 것을 전했다. 그러자 쇼우타는 언성을 높이며 전문학교나 유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쇼우타는 제발 엄마다운 역할을 하라며 타카오를 가정부처럼 부려먹지말라고 화를 냈다. 레이미는 타카오의 인생은 아들 본인의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항상 빤한 소리를 하는 쇼우타와의 언쟁은 항상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다. 쇼우타는 타카오가 구두장이를 하게 되면 제대로 벌어먹고 살기 힘들 것이라며 현실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레이미는 어릴 때와는 전혀 달라진 쇼우타에게 화를 내며 울기 시작했고, 술을 마시려했다. 쇼우타는 갑자기 우는 엄마의 모습에 당황하여 잘못했다며 달래려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면담에서 소이치로는 타카오가 일본의 대학에 가는 것이 안정성이 있다며 타카오를 설득했다. 하지만 타카오는 직업으로서 구두장이를 선택했고, 그 필요성으로 인해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학에 유학을 가려는 것이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학교에서 3자 면담을 하고 아들과 함께 나온 레이미는 타카오가 어느새 열여덟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이 절대 쫓아가지 못하는 속도로 아이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편으로 자신이 도와주었던 모모카가 어느새 3학년이 되어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인사를 해주는 것도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일조했다. 키요미즈와도 헤어진 레이미는 타카오가 유학을 가려는 곳이 이탈리아일 것이라 짐작했고, 자신에 비해 간단하게 도쿄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아들에게 의외성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미는 봄에 만들었던 구두에 대해 물었고, 타카오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지만 유학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은 듯했다. 타카오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말끝을 흐렸고, 그 말을 들은 레이미는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결심하고 지금의 여기까지 여행을 해 온 것이라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리고 레이미는 설령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심했다.

 어제 쇼우타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쇼우타는 한 달 뒤에 이탈리아로 출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레이미는 타카오가 도착하길 기다렸고, 먼저 시작하고 있으라는 타카오의 연락에 세 사람은 건배하며 맥주 캔을 부딪쳤다. 네 사람의 식사 자리에서는 이야기의 꽃이 피어났다. 쇼우타는 레이미 몰래 알아둔 키요미즈의 연락처로 그를 집으로 불러냈다고 말했고, 당황한 레이미는 이미 헤어졌다고 말하면서도 화장을 고치러 갔다. 타카오는 바로 오지는 않는다며 잔을 권했고, 쇼우타는 놀랍지도 않다며 심드렁한 반응을, 리카는 상을 다시 차려야 겠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제각각 다른 음료를 든 네 사람은 다시 건배를 했고, 타카오는 의지에 찬 목소리로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했다.

 

 

(11) 에필로그 - 더 멀리 걸을 수 있게 되면 - 아키즈키 타카오와 유키노 유카리

 

 고향으로 돌아갔던 유카리는 한 달 정도 지나 시내 사립 고등학교의 임시 교사 자리를 얻어 2년 반 정도를 근무했다. 그리고 교원 채용 시험에 응시해 작은 섬마을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의 고전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4년 반만에 도쿄에 도착한 유카리는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카오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2년 동안, 유카리와는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았었다. 타카오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2년 동안 생활하며 구두공방에 공부를 했다. 그리고 핀란드 헬싱키에서 오사카 편이 기체 결함으로 결항되는 바람에, 타카오는 세 시간 뒤에 있을 나리타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타카오는 5년 전 유키노의 구두를 만들기 위해 그녀의 발을 만졌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카오는 유카리를 위해 만든 구두가 들어있는 백팩을 메고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에는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타카오는 '우렛소리'를 속삭였다. 타카오에게는 예감이라는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정자로 향하는 그의 시야에는 담녹색 치마를 입은 여성이 정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카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뒤돌아 본 유카리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긴장한 표정을 바꾸고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타카오는 그 모습 때문에 비가 그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카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각 목차는 제시된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더불어 각 목차마다 중간에 중심 서술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생각됩니다.

 - 각 목차의 끝부분에는 만요슈[각주:11]의 일부분과 해석이 있습니다. 작중의 내용과 비슷한 구절을 비유적으로 인용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 작중에서 타카오와 유카리가 만나는 장소인 정원은 도쿄 메이지 신궁의 신주쿠 정원(국정공원)인 것 같습니다. 가장 첫 부분에 언급되며, 그 이후에는 그냥 '정원 또는 일본정원'이라고만 서술됩니다.

 - 이 작품은 인물의 행적이나 상황의 변화 등 보다는 인물 개개인의 심리묘사와 특히 회상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더불어 같은 상황의 전개가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바뀌어 서술되었기 때문에 내용을 기술함에 있어서 분량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언어의 정원
국내도서
저자 : 신카이 마코토(Makoto Shinkai) / 김효은역
출판 : 대원씨아이 2017.01.17
상세보기

 

 

  1. 천둥이 치는 소리. [본문으로]
  2. 이노카시라 공원, 샤쿠지이 공원, 고가네이 공원, 무사시노 공원, 쇼와 기념공원 등 [본문으로]
  3. 토리이(鳥居), 신사의 앞에 있는 일본의 전통적인 문을 말한다. 거대한 두 기둥 사이로 가로대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문으로]
  4. 絵馬. 일본의 신사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걸어둔 목판을 말한다. [본문으로]
  5. 비를 긋다. 비를 피하기 위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본문으로]
  6.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본문으로]
  7. 샤오홍은 많은 여자를 사귀었던 모양이며, 그가 홍콩으로 귀국하려는 것을 알게 된 듯하다. [본문으로]
  8. 일본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그에게는 일본이 더 이상 이상향이나 신세계가 아나게 되었고, 그 동안 큰 발전을 하게 된 홍콩에 흥미를 느껴 귀국했다. [본문으로]
  9. 자줏빛 찬란한 자초 밭 / 황실 땅을 오고 가시네 / 파수꾼이 보지는 않으려나 / 그대 소매 흔드는 모습을 [본문으로]
  10.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본문으로]
  11. 만엽집(万葉集; 萬葉集). 7세기 또는 그 이전의 시를 모아둔 시가집. 일본 시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약 4500수가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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